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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듀케이터와 명화 읽기] 렘브란트 <돌아온 탕자>
신미술관  Date : 2016-04-13 10:31:41     Hit : 1471

 

 

 

“성서는 그의 삶의 중추요, 슬픔과 외로움의 때에 위로요, 모든 것이 꼬일 때 유일한 소망이요, 최후로 의지할 마지막 수단이요, 그의 변호였다.”(얀 엥겔만, 1900-1972).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1517)이 있기 전까지 성경의 해석은 가톨릭 교회의 전유물이었다. 화가들은 성직자의 해석과 요구에 따라 개개인의 특성뿐 아니라 신앙의 색채도 제거한, 주문 그대로의 작품을 그려냈다. 그러나 종교개혁 사상과 함께 인쇄된 성경이 각국으로 퍼져나가면서 성경을 스스로 읽고 자기 자신의 신앙과 삶의 모습을 성화 안에 담아내는 화가들이 점차 늘어가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이후 이와 같은 기독교 미술의 변화를 가장 잘 드러낸 화가가 바로 렘브란트다. 특히 <돌아온 탕자>는 누가복음의 ‘탕자의 비유’에 대한 화가 자신의 묵상, 그리고 깊은 신앙 고백을 녹여내고 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 작품세계의 황금기를 보여줌과 동시에 크리스천으로서의 완숙기 또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렘브란트가 태어난 네덜란드는 종교개혁 이후 곧바로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인 곳이었고, 1545년부터 네덜란드어로 완역된 성경이 보급되면서 개혁교회가 융성해 있었다. 각 가정의 부모는 아이들을 말씀을 중심으로 양육했고, 렘브란트 역시 어머니로부터 성경을 배우며 자랐다. 또한 독실한 기독교 가문에서 자란 아내를 맞아 신실한 삶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부유한 가문의 딸이었던 아내의 유산과 명성을 바탕으로 젊은 나이에 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부를 축적하게 되자 축복과 같았던 물질이 그를 넘어뜨리는 도구로 변질되기에 이른다. 그림을 팔아 번 돈으로 값비싼 저택을 구입하고 사치품을 끊임없이 사들이면서 빚더미에 앉게 된 것이다. 심지어 결혼 후 10년이 채 되기도 전에 네 명의 자녀 중 세 명이 사망하고 아내와도 사별하게 되면서 물질에 대한 그의 집착은 더욱 심해진다. 그의 탐욕에 대한 소문은 미술 시장까지 퍼져 그의 그림이 철저히 외면받게 만들었고, 결국 렘브란트는 50살이 되던 해 전재산을 몰수당하고 빈민촌으로 쫓겨나게 된다. 

 

부요하고 명망 있는 가문과의 혼인, 화가로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그릇된 행실로 궁핍한 삶을 맞게 된 그는 복음서의 ‘탕자의 비유’를 읽으며 탕자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가 생의 마지막 해에 그린 <돌아온 탕자>는 표현 양식과 서술적인 측면 모두에서 이전과는 다른 특징을 보이고 있다. 바로 자신의 고난을 통한 회개의 묵상을 투영함으로써, 젊은 시절 강렬한 빛의 대비를 통해 극적이고 외형적인 서술을 강조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부드러운 빛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내적이고 깊이 있는 감정을 묘사하게 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 렘브란트는 뛰어난 명암법을 구사해 ‘탕자의 비유’를 묘사했다. 어두운 배경 속 부둥켜안은 탕자와 아버지에게는 밝은 빛이 쏟아지고, 또 다른 주인공인 큰아들은 그 빛에 들어오지 못한 채 어둠 가운데 서서 차가운 시선으로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 그의 얼굴에는 재회의 기쁨은 전혀 없이 아버지에 대한 섭섭함만이 굳게 다문 입술에서 풍겨져나오며, 지팡이를 쥔 손과 경직된 자세는 그의 닫힌 마음을 드러낸다. 한편 아버지의 어깨에 걸쳐진 붉은 망토는 아들을 감싼 팔을 따라 떨어지는 부드러운 곡선과 아들의 어깨 위에 위치한 풍성한 술을 이용해 탕자를 품에 안은 아버지의 제스쳐를 강화하고 있다. 또 보혈을 상징하는 붉은 색을 아버지의 망토와 큰아들의 의복에 함께 사용하여, 큰아들의 원망까지도 용서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 품에 안긴 탕자의 허름한 옷차림과 매무새는 아버지나 형의 모습과 눈에 띄게 대조적이다. 본래 ‘탕자의 비유’에서 큰아들은 아버지가 둘째 아들을 위한 연회를 베푼 후에 등장한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이 작품 속의 탕자를 아버지가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난 후의 모습이 아니라, 처음 아버지께 돌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던 장면의 초라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 렘브란트가 숨을 거둘 당시 그의 전재산은 헌 옷가지 외에는 낡은 성경책 한 권과 그림 도구만이 전부였다고 전해진다. 렘브란트는 빈민촌에서의 여생을 오로지 성경을 읽고,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했다. 특히 자기의 얼굴을 사도 바울의 모습으로 그린 자화상을 연이어 그리면서, 겸손하고 약한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바울의 고백을 묵상했다. 

 

그의 말년은 가장 가난하고 외로운 시기로 여겨지지만, 이 시기 남겨진 작품들은 오히려 렘브란트가 주의 은혜 아래 살며 겸손히 감사를 고백하며 여생을 보냈음을 보여준다. <돌아온 탕자> 속에서 닳아 벗겨진 신발과 헤어진 옷을 입고 돌아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은 탕자처럼, 렘브란트의 마지막은 허름하고 궁핍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런 탕자를 온몸으로 껴안아 감싸는 아버지 품에 안기도록 그림으로써, 렘브란트는 그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 안에 안겨 있음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신미술관 에듀케이터 신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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